<이교성칼럼>생명을 물려주는 생명의 종교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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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마간다통신 댓글 0건 조회 2,025회 작성일 15-04-08 14:51본문
천하보배 자기관리(19)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심(宗敎心)일 것입니다. 물론 이성(理性)의 존재여부도 문제이지만 종교심은 이성(理性)을 뛰어넘는 영원(永遠)과의 관계적 요소를 삶에 가졌나하는 큰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도(印度) 사상에는 동물도 인간과 같이 3계 6도를 윤회(輪回)한다고 가르치지만 솔직히 지켜보면 동물에게는 제사나 예배가 없고 기도가 없고 적선(積善)하는 연보(捐補)같은 어떤 행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동물들의 지능세계를 좋게 봐준다 해도 영원에 대한 인지(認知)요소가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인간세계에 크게 알려져 자리 잡은 종교들을 보면서 어떤 종교가 과연 우리에게 영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종교일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종교의 조건은 사람의 “생명의 원리”에 맞아야 된다고 봅니다.
종교의 추구하는 목적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든, 지고선(至高善), 행복, 불멸(不滅),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막론하고, 생명의 법과 통하는 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하고 또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봄이 되면 삼라만상에 가득한 생명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주어진 수명에 따라 살다가 죽지만 그 종류(種類)대로 생명을 이어가고 DNA를 물려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수십억년 수백억년도 추측할 만큼 지구상에 생명체의 역사가 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명체의 영원한 구원이든 최고의 행복한 경지이든 어떻게 얻을 수 있고 구할 수 있는지는 역사 이래 인간의 최고의 숙제였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온갖 종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특히 100년 정도에 늙어서 죽어, 썩어져가는 인간의 초라함에 대해 더 영원하고 의미 있는, 억겁(億劫)이라도 있을 수 있는 인간생명의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 종교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찰라 같은 인생을 살면서, 허무하게 한줌의 재로 화장터에서 흩어져가는 가족 친지들을 보면서 영겁을 사모하는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누가 흉본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비정한 동물일 것입니다.
여기에 솔직한 조사(照査)가 있으면 누가 흉을 보겠습니까? 조그마한 회사 설립을 해도 시장조사를 하고 현장을 정밀하게 분석하는데 한번뿐인 인생을 책임지고 맡아줄 진리체계를 찾는데 어찌 허술한 결심으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중국 현인의 말처럼, “아침에 진리의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한 것” 참 종교의 위력인데 무엇을 대충하고 심심풀이로 하시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원리를 가진 종교”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그 원리를 찾으면 대부분의 씨앗이 죽어야 그 씨앗에서 열매가 다시 태어납니다. 돌에서 양식이 태어나길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서 이론을 심거나, 높은 지식을 심거나 선행과 구제(救濟) 행동을 심어서, 또 자신의 근육을 키우듯 절제력을 연단하여 영원한 생명을 거두려한다면 이상한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생명을 심어야 생명이 난다는 진리가 있는데 어떤 종교는 테러에 가담하여 생명을 죽여서 자신이 영원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으니 참 이상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그러한 생명의 원리가 있습니다. 동물의 생명을 지배하는 어미역할의 암컷이 있고 아버지 역할의 수컷이 있습니다.
가시고기나 연어 등은 자기 새끼들에게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정말 희생하며 공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다새(Pelican)는 자기 목 안의 주머니에 음식을 넣어 보관했다가 새끼들에게 주어 먹게 하지만 강추위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자신의 살을 부리로 뜯어서 새끼들에게 먹이고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는 모성애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의 희생을 통해 후세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사람도 비정한 일부를 제외하면 그 희생심이 더욱 돋보입니다. 식물이나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식사랑은 인간의 강력한 본능에 속합니다. 세상에 자식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을 사람은 부모인 것입니다. 혹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분이 있어도 곰곰이 생각할 일이 이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시고 또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기념하는 계절입니다. 신중하게 그분의 희생과 부활의 능력을 묵상하고 결단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 관리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복음 26장 26-28절)
-글쓴이-마닐라명성교회 담임-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심(宗敎心)일 것입니다. 물론 이성(理性)의 존재여부도 문제이지만 종교심은 이성(理性)을 뛰어넘는 영원(永遠)과의 관계적 요소를 삶에 가졌나하는 큰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도(印度) 사상에는 동물도 인간과 같이 3계 6도를 윤회(輪回)한다고 가르치지만 솔직히 지켜보면 동물에게는 제사나 예배가 없고 기도가 없고 적선(積善)하는 연보(捐補)같은 어떤 행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동물들의 지능세계를 좋게 봐준다 해도 영원에 대한 인지(認知)요소가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인간세계에 크게 알려져 자리 잡은 종교들을 보면서 어떤 종교가 과연 우리에게 영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종교일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종교의 조건은 사람의 “생명의 원리”에 맞아야 된다고 봅니다.
종교의 추구하는 목적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든, 지고선(至高善), 행복, 불멸(不滅),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막론하고, 생명의 법과 통하는 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하고 또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봄이 되면 삼라만상에 가득한 생명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생명들이 주어진 수명에 따라 살다가 죽지만 그 종류(種類)대로 생명을 이어가고 DNA를 물려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수십억년 수백억년도 추측할 만큼 지구상에 생명체의 역사가 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생명체의 영원한 구원이든 최고의 행복한 경지이든 어떻게 얻을 수 있고 구할 수 있는지는 역사 이래 인간의 최고의 숙제였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온갖 종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특히 100년 정도에 늙어서 죽어, 썩어져가는 인간의 초라함에 대해 더 영원하고 의미 있는, 억겁(億劫)이라도 있을 수 있는 인간생명의 미래를 보장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진솔한 모습이 종교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찰라 같은 인생을 살면서, 허무하게 한줌의 재로 화장터에서 흩어져가는 가족 친지들을 보면서 영겁을 사모하는 인간의 솔직한 모습을 누가 흉본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비정한 동물일 것입니다.
여기에 솔직한 조사(照査)가 있으면 누가 흉을 보겠습니까? 조그마한 회사 설립을 해도 시장조사를 하고 현장을 정밀하게 분석하는데 한번뿐인 인생을 책임지고 맡아줄 진리체계를 찾는데 어찌 허술한 결심으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중국 현인의 말처럼, “아침에 진리의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한 것” 참 종교의 위력인데 무엇을 대충하고 심심풀이로 하시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원리를 가진 종교”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식물의 세계에서 그 원리를 찾으면 대부분의 씨앗이 죽어야 그 씨앗에서 열매가 다시 태어납니다. 돌에서 양식이 태어나길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서 이론을 심거나, 높은 지식을 심거나 선행과 구제(救濟) 행동을 심어서, 또 자신의 근육을 키우듯 절제력을 연단하여 영원한 생명을 거두려한다면 이상한 논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생명을 심어야 생명이 난다는 진리가 있는데 어떤 종교는 테러에 가담하여 생명을 죽여서 자신이 영원한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경우도 있으니 참 이상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그러한 생명의 원리가 있습니다. 동물의 생명을 지배하는 어미역할의 암컷이 있고 아버지 역할의 수컷이 있습니다.
가시고기나 연어 등은 자기 새끼들에게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정말 희생하며 공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다새(Pelican)는 자기 목 안의 주머니에 음식을 넣어 보관했다가 새끼들에게 주어 먹게 하지만 강추위로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자신의 살을 부리로 뜯어서 새끼들에게 먹이고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는 모성애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자기 생명의 희생을 통해 후세에게 생명을 이어주는 것이 생명의 원리입니다. 사람도 비정한 일부를 제외하면 그 희생심이 더욱 돋보입니다. 식물이나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식사랑은 인간의 강력한 본능에 속합니다. 세상에 자식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을 사람은 부모인 것입니다. 혹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분이 있어도 곰곰이 생각할 일이 이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시고 또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기념하는 계절입니다. 신중하게 그분의 희생과 부활의 능력을 묵상하고 결단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 관리입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복음 26장 26-28절)
-글쓴이-마닐라명성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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