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 전 정치가 베니그노(니노이) 아퀴노 Jr.의 아내였던 마리아 코라존 C. 아퀴노는 시민들에게 ‘코리’라고 불리웠다. 코리는 1933년 1월 25일 출생. 그 당시 대통령은 남자들만의 위치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그녀가 필리핀을 이끌어 갈 대통령이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여성은 가정일에만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고 가족들은 남자 아이들에게만 기대를 가졌다.
조세 코주안코 Sr.와 데메트리아 수물록의 사이에서 태어난 8명의 자녀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호세 코주안코는 국회의원으로 부유함과 유명함을 겸비한 사람이었으며 탈락에 있는 그들 소유의 거대한 농장은 하시엔다 루이시타라고 불리웠다.
코리는 초등 교육과정을 세인트 스콜라스티카 대학과 어섬션 대학에서 이수하였고, 중등교육은 어섬션 대학과 라벤힐 아카데미, 뉴욕에 위치한 노틀담 아카데미에서 마쳤다. 그녀는 뉴욕의 세인트 빈센트 산 대학과 맨하탄의 노틀담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수학과를 전공, 1953년 졸업했고 필리핀으로 돌아와서 FEU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코리는 대학시절 방학을 맞아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니노이 아퀴노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니노이의 상냥하고 신사적인 행동과 총명함에 끌리게 되었고 1954년 10월 11일, 파사이시 Our Lady Of Sorrow Church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들은 미국으로 옮겨가 마리아 엘레나(발시), 오로라 코라존(핑키), 베니그노 3세(노이노이), 빅토리아 엘리사(비엘)과 크리스티나 벨나데테 5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의 남편 베니그노 (니노이)아퀴노는 정계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1956년, 탈락지역의 시장으로 활동하였고 1961년 10월, 28세의 나이로 탈락 지방 장관으로 선출되어 정계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67년 니노이가 상원의원에 출마하였을 때 그의 어머니와 코리가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여 극적으로 상원의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8월 21일, 미란다 플라자에서 열렸던 야당 모임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나 당시 니노이는 없었지만 니노이가 속한 정당 임원들의 대다수가 심한 부상을 당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니노이는 구속되어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니노이와 코리는 별거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니노이의 구속에 대하여 시민들은 여당의 수장역할을 맡고 있으며 1973년 열릴 대선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 중 유망자로 떠오른 그를 대통령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구속으로 인하여 7년 7개월 동안 별거생활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그들 부부는 니노이가 심장질환으로 미국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 때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들은 보스톤에서 생활하였지만 3년 후 니노이가 그의 국가와 국민들을 위하여 필리핀으로의 귀국을 계획하였고 필리핀에서의 재수감 생활을 예상했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필리핀 땅에 발을 디딘 순간 암살되었다. 니노이의 사망은 필리피노들의 반정부 운동을 고취시켰다.
시민들은 정부에 대항하여 모두 나와 죽음이나 구속의 두려움을 잊은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코리가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항하여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정치에 입문하기를 원치 않던 코리였지만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로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필리핀 시민 백만 명 이상의 서명운동을 힘입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고 그녀의 선거공약으로 신 정부와 신 사회 건설을 내세웠다. 마르코스는 1986년 2월 7일, 대통령 간접선거를 실시했다. 선관위(선거관리위원회)의 결과로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재당선이 발표되었지만 그녀와 시민선거관리단체(NAMFREL)는 그들의 집계결과 코리가 당선되었다고 주장, 선거 발표에 반대하며 몇 곳의 국영사업 품목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였다.
1986년 2월 22~26일에 발생한 범 국민적 운동인 ‘시민들의 힘’(PEOPLE‘S POWER)을 통해 코리는 마르코스를 제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도이 라우렐씨가 그녀와 함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대통령 임직을 민주주의의 재정착을 기점으로 실시하였다. 그녀는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을 이길 수 있도록 가장 선봉에서 활동했던 주안 폰세 엔릴씨를 국방부 장관으로, 피델 라모스씨를 필리핀 군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필리핀의 군인들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혁명에서 사용했던 무기로는 묵주, 기도, 꽃, 음식, 담배뿐이었다. 그 날의 시민혁명은 무장 군인들이 시민들과 마주쳤으나 비무장인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않았으므로 유혈사태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캠프 크라임과 캠프 아귀날도를 주안 폰세 엔릴, 피델 라모스씨의 지휘 아래 봉쇄하였다. 마르코스 일가가 말라카냥을 떠났을 때 그들의 생활하던 주거지를 본 시민들은 모두 분노하였으나 마르코스가 정말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또한 그 곳에 설치된 치료기구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수사가 실시된 후 마르코스 일가는 정부의 자산 중 천만 달러 상당의 금액을 횡령한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국외은행과 기업에 투자, 아내를 위한 값비싼 보석 장신구를 사주는 형태로 국외로 횡령하였다. 이러한 일이 밝혀짐에 따라 마르코스 일가는 정부의 자산을 횡령한 사건으로 매우 유명해졌다.
1986년 2월 25일, 코리와 도이 라우렐은 산후안에 위치한 그린힐스의 클럽 필리피노에서 법관 클라우디오 티한키를 보증인으로 EDSA혁명이 중반으로 치달을 무렵 대통령, 부통령으로 취임 했다. 그와 같은 날, 마르코스 대통령 또한 말라카냥에서 취임식을 했지만 그가 국외로 추방당한 후 코리와 도이 라우렐은 즉시 대통령과 부통령으로의 직무에 들어갔다.
미국은 필리핀에 새로운 정부가 탄생한 것을 필리핀 장관 조지 스컬즈를 통해 제일 처음으로 알았고 다른 나라들도 미국을 통해 필리핀의 신정부 탄생을 알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설립되었으며 이것은 시민들의 혁명을 통해 설립된 정부라 하여 혁명정부라고 불리웠다. 이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국민에 의해 수립된 민주주의 정부였다. 임시정부가 설립된 이후 국민의 민권보장과 헌법의 개정이 요구되었다.
이와 함께 코리 아퀴노는 1986년 2월 25일, 대통령령 3호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독립된 헌법으로 알려진 임시 법을 포함했다.
임시 법은 1) 과거 헌법 형태의 보존 2) 바타산 팜반사(Batasan Pambansa)의 제거 3) 정부에서 행해지던 독직과 뇌물수수 금지 및 위반자들에 대한 처벌
코리 아퀴노는 조세 W. 디오크노를 의장으로 선출한 인권보장 위원회를 설립, 또한 국가의 정치력 강화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다. 아퀴노 대통령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독립헌법 위원회(Con Com)를 선출하여 총 48명으로 구성하였다.
이들은 로벌토 콘셉션 판사(84세)가 최 고령자, 젊은 층의 대표 조세 친토 가스콘(22세)을 최 연소자로 구성되었다. 1986년 10월 12일, 헌법 위원회에선 새로운 법의 윤곽을 제시하였다. 고등법원에서 과거 판사직을 연임했던 세실리아 무뇨스 팔마를 의장으로 구성된 헌법위원 중 새로운 헌법에 가장 찬성을 했던 사람은 그녀였고 제임 수아레즈, 제임 타데오, 리노 브록카는 신 헌법을 과히 찬성하지는 않는 측의 지도자였다. 아퀴노 대통령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신 헌법을 제시한 후 국민투표의 기회를 주어 결정권을 부여했다.
1987년 2월 2일에 열린 선거는 가장 공정하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신 헌법에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자문기구의 형성과 필리핀 국어의 선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행한 몇 가지 일들은 1) 민주주의의 재정립 2) 신헌법의 제정과 공포 3) 반대자, 공산주의자, 모슬렘, 산림지역 등과의 평화적 대화 시작. 그러나 정부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로 고통을 겪었다.
1990년 7월 16일, 필리핀을 강타한 진도 7의 심한 지진으로 누에바 에시자와 바기오 지역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그것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중동에서 일어난 걸프전으로 인해 발생한 유류파동이었다.
이것은 이라크의 수상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발발되었다. 중동지역으로부터 기름을 공급받아왔던 필리핀은 유가의 인상에 따라 기본 생필품의 가격 또한 오르게 되었다. 이와 병합하여 교사들과 공무원들이 생활에 미달되는 금액을 지급 받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정부에 임금인상을 요구하였으나 당시 재정의 궁핍에 시달려 오던 정부로선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청렴한 정치를 했지만 모든 국민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아퀴노 정권 당시 필요했던 것은 상호간의 협력과 국민 전체의 화합이었다. 그 당시 모든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정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닥쳐온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했다면 긴 시간의 독재정치 끝에 다시 문을 연 민주주의 정부와 사회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