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2월 30일, 필리핀 정부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을 역임한 마르코스 대통령이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로코스 놀테의 사랏에서 1917년 11월 11일, 변호사 마리아노 R. 마르코스와 선생님인 조세파 에드랄린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지능을 지녀 초등교육 당시 최고의 성적을 이수했고, 또한 고등학교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UP에서 대학교육과정 또한 최우수 성적자로 졸업했다. 그는 졸업논문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퀘죤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상을 받기도 했다. 마르코스의 우수성이 학업에서만 빼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 시절 동안 수영, 복싱, 레슬링에 탁월한 기량을 보여 재학 시절동안 선수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문장력도 우수해 대학과정 당시 대학뉴스를 맡아 담당하기도 했고 웅변력도 탁월하여 퀘죤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웅변가 상을 받았다. 그의 삶에도 역경이 찾아와 변호사 시험을 치르던 중 새로 선출된 일로코스 놀테의 대의원 줄리오 날룬다산의 살해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살해된 대의원은 그의 아버지와 경쟁자였다. 재판을 위해 마르코스에게 좋은 변호사가 선출되어 노력했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1939년 변호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대법원을 놀라게 했으며 그들은 마르코스와 다시 인터뷰를 통해 여러 질문에 문답식으로 재시험을 보도록 했지만 마르코스는 그의 명석함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그의 이같은 좋은 성적에 놀란 이들은 마르코스를 다시 재판하였으며 변호사를 통하지 않은 그의 변호만을 통해 무죄판명이 되었다.
1941년 12월, 전쟁이 나자 그는 필리핀 정부로부터 징집영장을 받아 바타안에서 전쟁기간 동안 용감히 싸웠으며 적군에게 체포되어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을 한 후 카파스 탈락과 산티아고 요새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는 또한 게릴라 군에도 지원하여 많은 훈장들을 수여받았으며, 소령이 된 후 시민으로 복귀했다. 전쟁이 종료된 후 커먼웰스 정부가 수립되었고 오스메냐 대통령 후 로하스 대통령이 1946년 5월 28일 취임했다. 로하스 대통령은 마르코스를 경제 고문으로 지명, 그의 임기 동안 마르코스는 재향군인들의 많은 혜택 부여를 위해 공헌을 했다. 그의 뛰어난 임무 수행능력에 감동한 로하스 대통령은 그를 워싱턴에서 필리핀 재향 군인회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대변인으로 활동하도록 했으며 그는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여 많은 금액의 포상을 필리핀 재향군인들에게 돌려 주었다.
1949년 마르코스는 자유당의 위원으로 선거에 출마하여 22세의 어린나이에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53년 재선에도 당선, 장관 직을 연임하였다. 1954년 4월 6일, 그는 이멜다 로말데스를 만나 그해 5월 1일 결혼을 했고 이멜다, 펠디난드 Jr. 이레네를 낳았다. 1957년 다시 의원으로 출마한 그는 당선되어 장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성공을 본 소속 정당에선 대의원 출마를 제의했고 1959년 가장 높은 표를 얻어 대의원이 된 후 1960년 대의원 모임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마르코스는 대통령으로 출마할 생각이 있었지만 그는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그의 선거유세 활동을 계획하고 보좌하였다. 마르코스의 조직적인 도움으로 대통령에 선출된 마카파갈은 그를 대통령 보좌관으로 임명하였고 정치와 여러면에서 도움을 받았다. 마카파갈의 임기가 끝날 무렵이던 1961년 마르코스는 마카파갈이 대통령 재임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1964년 4월 21일, 그의 소속 당을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바꾸어 1965년 11월 9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부통령으론 페르난도 로페스가 당선 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민주당은 마카파갈과 제랄도 록사스로 구성된 자유당 정권을 누를 수 있었다.
◇ 첫번째 대통령 임기
1965년 12월 30일, 마르코스가 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그는 교육부분과 복지, 방위, 하부구조에 대하여 책정된 정부 자산이 미비한 연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마르코스의 첫 번째 대통령 임기 동안 이룬 일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
1. 새로운 조세제도 설정
2. 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
3. 양질의 쌀 생산, 관개수로 설치
4. 빈곤으로 교육 받지 못한 농부들을 위한 재정적, 기술적
지원의 확대.
5. 많은 도로와 다리, 학교 건설
6. 수출과 수입 규제
7.1966년 10월 24일~25일 이틀 동안 호주, 한국, 뉴질랜드, 필리핀, 남 베트남, 미국의 수뇌들이 모여 평화와 각국간의 이해를 조성했던 마닐라 수뇌회담 개최.
1967년 11월 14일 있었던 대선에서 마르코스가 다시 대통령으로 재선출되자 필리핀의 모든 국민들은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대통령 연임으로 매우 기뻐하였으며 또한 그가 1969년 12월 30일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따갈로그로만 사용한 대통령 취임사로 큰 자부심과 기대감을 가졌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야기되었던 필리핀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가의 폭등으로 인한 필리핀 경제의 침체였다. 극심한 유가인상은 모든 생필품의 가격을 끝없이 상승시켰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일터에서 몰아내어 심각한 실업률을 기록했고 페소가치의 하락으로 경제의 혼란이 발생했다.
이 기간 중 야기된 문제는 ① 정치의 부패. ② 정부의 심각한 뇌물 착취. ③ 빈부 격차의 극대화. ④ 국가적 문제들에 대해 1935년 제정한 법률에 드러난 정부의 미약한 관심과 노력. ⑤ 범죄율의 증가들로 인해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신용도를 잃게 되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자 국민들은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그들의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실현을 꿈꾸기 시작하였으며 호세 리잘의 ‘젊은이들은 국가의 새로운 미래’라는 표어 아래 많은 대학생들이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시위는 당시 필리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의 많은 반정부 시위 중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 것은 1970년 1월 30일, 말라카냥을 공격했을 때였으며 당시 6명이 사망, 많은 학생들이 중태에 빠지게 되었으나 반정부 시위자들은 포기하거나 조용해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더욱 강도 높은 반정부 시위를 하게 된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말라카냥으로 통하는 입구인 멘디올라 다리가 혹시라도 있을 공격에 대비해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모두에게 이야기 거리로 떠오르게 되기도 하였다.
많은 학생들로 구성되었던 반정부 시위자들의 목표를 보면 부정과 부패가 없는 깨끗한 정치제도, 토지의 재분배를 통한 사회 질서의 확립, 생필품의 가격 인하와 안정, 실직자들을 위한 새 일터형성, 좋은 교육시설 등이었으며 그들은 이것을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기 위해선 새로운 정권수립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맺었던 것이다.
1971년 6월 1일, 마닐라 호텔의 피에스타 파빌리온에서 열렸던 의회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은 현 시점에 국가가 안고 있던 사회, 경제, 정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한 자문을 당시 참석했던 모든 전직 대통령들에게 부탁했다.
1971년 8월 21일 저녁, 11월 8일에 있을 지방선거를 위해 자유당원들이 선거유세를 하던 중 양쪽에서 두 개의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8명의 사망자와 120명 이상의 부상자를 내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또한 대의원 조비토 살론가, 서지오 오스메냐 Jr., 이바 칼라우 의원, 라몬 미트라 후보, 애디 이랄데 등 많은 정치인들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르코스 대통령은 대통령령 889호를 발표하여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려 하였다. 하베아스 콜프스(Habeas Corpus)라고 불리던 대통령령은 1971년 9월 18일, 27개의 지방과 도시들에 실행되었고 1972년 1월 11일에는 필리핀 전역에 공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성직자, 직장인, 수녀들로 구성된 반정부 시위 단체들의 개인 소유지, 백화점, 선거 유세장 등에 대한 폭탄테러가 그들의 상징인 붉은 깃발과 함께 끝없이 계속되어 많은 인명 피해가 속출하자 마르코스의 대통령권 사용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72년 9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1972년 9월 23일 계엄령을 경험했다. 계엄령은 공식적으로 1972년 9월 21일 선포되었으며 2일간 실시되었다. 그것은 마르코스가 그의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실시했던 것이었다. 그는 계엄령의 선포가 국가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실시된 것이라고 전 지역에 설명하였으며 국가를 위한 새로운 지침들을 실행하여 더 나은 사회건설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자신을 위한 정치왕국을 세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국가를 이끌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이미 갖고 있었다. 다른 방면으로는 1971~72년 헌법의회가 그들의 직무를 1973년 11월 29일에 끝냈고 1973년 1월 19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마르코스는 1973년 1월 17일, 1102호 선언을 발표하여 1972년 12월 바랑가이에 의해 실증된 새로운 헌법을 대통령령 48호에 의거 실행하였다. 이러한 실증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되어 대법원에서 논의가 되었지만 1973년 3월 31일 부결되었다.
이와 같은 대법원의 결정과 함께 대통령은 그의 직무상 기관들의 기반이 되었던 새로운 선언을 발표한다. 마르코스는 그의 민주적 개혁과 새 사회에 대한 그의 견해들을 많은 책으로 저술하였고 그 중 현시대의 개혁, 민주주의와 새 사회란 책에서 권력과 세력을 유지하려는 의식이 투영되었다. 계엄령의 초기엔 범죄율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으나 마르코스가 헌법을 선포하자 국민들은 정부에 대항하여 많은 시위를 하였다.
계엄령 선포기간 동안 마르코스는 베니그노 아퀴노 Jr.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여 가두었다. 그의 임직기간 동안 활동한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는 마르코스-미국간의 묵인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필리핀의 현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비난하였으며 1965년 이래로 그와 그 가족이 이러한 세력을 힘입어 이러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마르코스의 생애에 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지만 필리핀에선 자유로운 판매가 불가능 하였고 그의 권력 지속을 원하던 사람들은 그의 고향친구들과 미국, 다국적 협력단체뿐이었다.
다른 국민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그들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계엄령은 아시아의 민주주의 정착에 필리핀이 실패하였음에 필요시된 것이었다. 철저한 좌익세력들은 계엄령 선포로 인하여 필리핀 민주주의 정착에 대한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은 결코 성사될 수 없고 부유계층과 미국인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데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민주주의가 필리핀에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은 정치문제와 민족주의에 대한 항의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과 종교단체들과 학생들이 그러한 움직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에 비추어 알고 있었다.
다음은 새로운 사회가 형성된 7년의 기간 동안 성립된 사항들이다.
1) 계엄령 선포 이전 존재했던 정부 인사들 산하 사설 군인의 해산으로 평화와 안정이 미약하게나마 성취됨.
2) 농업과 산업의 발달로 인한 국민총생산(GNP) 성장.
3) 토지 정치계획의 선포.
4) 외국 투자가들에 대한 초청.
5) 중화민국, 루마니아, 쿠바, 소비에트 연방, 독일과 같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들과 다른 민주주의 국가간의 화합을 위한 외교활동.
6) 문화회관, 민속 예술관, 산 주아니코 다리, 필라이프 등의 사회 기본시설 설립.
7) 활동적이며 진보적인 경제활동 홍보를 위한 관광객 유치추진.
8) 예술과 문화부분을 장려하여 포상.
9) 1973년 좋은 표본을 지닌 헌법 제정
a) 수상을 최고 지도자로 하는 의회제의 도입, 대통령의 권한 축소. 계엄령 선포기간 중에 이루어졌던 전국 의회의 투표에 의해 마르코스는 수상으로 선출되어 두 가지 직책 역임.
b) 투표권이 있는 만 18세 이상의 사람이면 문맹자와 상관없이 강제 투표 실시.
c) 필리피노라 불리는 국어(따갈로그)를 제정하였고 그와 함께 영어와 스페인어 도입.
계엄령 선포기간 동안 정부는 모슬렘 소지의 많은 땅을 사들여 도로, 다리, 모슬렘 성전들과 여러 사회 기반시설의 확충을 했다. 정부는 또한 필리피노 모슬렘들이 해마다 메카로 여행하는데 신변보호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그들의 주거지를 비쿠탄, 타긱, 리잘에 설치하여 생활을 보장하였다.
UP에서도 이슬람 전문학과를 신설하였고 1973년 9월 16일엔 마귄다나오의 지도자 술탄 쿠다랏을 필리핀 영웅으로 인정하였다. 현재 코토바토는 분리되어 술탄 쿠다랏이란 이름의 섬이 있다. 1973년 10월 코토바토 북쪽의 마귄다나오, 바실란과 타위-타위는 민다나오의 새로운 지방으로 이름되어졌다. 같은 해 8월 3일, 마라위에 지어진 필리핀 아마나 은행의 모슬렘 소유 인정. 계엄령 선포 기간 동안 대통령은 많은 정부 관료들을 바꾸거나 등용했지만 시민들에게는 계엄령을 통해 국민의 시민권이 인정되고 더욱 확실시되는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했다. 마르코스가 만든 또 하나의 변혁은 1972년 개정한 교육법 6호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의 교육 조건에 필요시된 것으로 고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직업교육을 통하여 사회에서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제도였다. 고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직업교육을 받을 것인지 대학 과정을 이수할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대입 학력고사(NCEE)가 도입되었다. 다른 방면으론 미국과의 관계를 통하여 계엄령을 더욱 확실히 하였을 뿐 아니라 공산국가들과 필리핀보다 발전한 아시아의 국가들 간의 관계를 통하여 필리핀의 위상을 높여갔다. 이 기간 동안 마르코스는 무엇보다 경제와 보안력을 확실히 다져 놓은 것은 사실이다.
국가에 민주주의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마르코스는 계엄령 기간 내에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스스로 정당 대표로 출마하였고 그의 아내 이멜다 마르코스가 메트로 마닐라 후보로 출마했다. 그의 당 외에 다른 정당은 이 선거에서 모두 배척되었으나 유일하게 다른 당에서 출마한 사람은 당시 감옥에 있던 베니그노 아퀴노가 자유당 소속으로 상원의원에 출마한 것이었다. 마르코스가 속한 정당이 승리한 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었던 것은 다른 정당에 주어진 표를 사기극을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변조했기 때문이다.
1978년 6월 12일, 국회법 기간 중 마르코스에게 의회정부를 도입할 것이 건의되었으며 그로 인해 수상이자 대통령인 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다.
1981년 1월 17일, 마르코스는 대통령령 제 2045조를 통해 8년 4개월간 지속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계엄령이 해제된 후 1981년 6월 30일, 필리핀에선 새로운 정부가 탄생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국가적 문제였던 독점과 부패, 공산주의자들 간의 분쟁, 테러리스트와 국가 경제문제는 여전히 존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에 복합적으로 미 군부대에 대한 테러가 급증하자 이에 불안을 느낀 미국 정부는 마르코스에게 필리핀 군인들의 도덕성을 향상시킬 뿐더러 국민들이 가장 대통령으로서 신임하고 선출하고자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기 위해 거짓 없는 공정한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을 촉구했다.
1983년 8월 21일, 베니그노(니노이) 아퀴노 Jr.는 그의 살해를 우려한 많은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필리핀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신념 아래 미국에서 귀국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필리핀 국제공항에서 공항 안전요원의 명령 아래 살해되었는데, 살해범은 롤란도 갈만으로 알려졌다. 다른 이들은 롤란도 갈만은 니노이가 사망하기 전에 먼저 살해되었으며 무엇보다 그의 죽음은 법과는 관계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인정했다.
시민들은 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많은 이들은 몸에 노란 리본을 두르고 ‘나의 조국’이라는 제목의 니노이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며 마르코스 정권의 마감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이 진행되자 외국 투자가들은 필리핀에 대한 투자를 보류하였고 이 무렵 있을 예정이던 미국 대통령의 방문 또한 연기되었다. 니노이 아퀴노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당시 처한 국면으로 볼 때 정확한 결과는 기대될 수 없었다. 이 수사는 코라존 줄리아노 아그라바, 아마도 디아존, 루시아노 살라잘, 단테 산토스와 엘네스토 헤레라로 구성된 AGRAVA에 의해 실시되었다.
AGRAVA의 조사기록을 보면 1984년 10월 23일, 자행된 니노이 아퀴노의 살해는 군에 의한 것이었으며 군인이 아퀴노를 사살하였으며 정부가 발표했던 갈만씨가 사살한 것은 아니었다. 이 기록은 모든 AGRAVA의원에 의해 서명되었고 파비안 벌 장군, 쿠에바스 장군, 쿠스토디오 장군을 포함한 26인의 군인들이 살해자로 판명되었다. 마르코스는 AGRAVA로부터 이 보고를 받았고 죄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나 무죄로 기각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잃었다. 국민들은 새 정권을 통해 인권이 존중되기를 무엇보다 원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이 무렵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를 공포했다. 1986년 2월 7일 실시된 선거에는 니노이 아퀴노의 아내 코라존 C. 아퀴노가 출마하여 마르코스와 대결을 벌였다.
공정선거를 위한 국민활동기구(NAMFREL)가 선거를 감시하도록 허용되었으나 선관위의 발표는 마르코스의 재당선이었다. 코라존 아퀴노는 NAMFREL의 집계결과 당시에는 그녀가 승리한 것이었음을 주장했다. 그녀는 필리핀 국민들에게 정부 은행과 몇 가지 정부 생산물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촉구했다. 무엇보다 큰 사건은 1986년 2월 22일에서 25일 사이 주안 폰스 엔릴 국방부 장관과 피델 라모스 국방부 보좌관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1986년 2월 22일, 국방부 장관 엔릴과 보좌관 라모스는 기자회견을 통하여 마르코스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이번 선거는 코라존 아퀴노가 승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르코스에게 대통령직 사임을 요청하며 전 국민에게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마닐라 추기경 칼디날 신 또한 이 기간 동안 대규모 집회를 통해 필리핀 국민들에게 엔릴과 라모스의 지지를 호소했다. 니노이 아퀴노의 형제 버츠 아퀴노는 EDSA에 위치한 모든 군인 캠프들을 저지하는 것을 맡았다. 몇 천의 시민들이 EDSA에 직업과 나이, 종교에 관계없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캠프 아귀날도와 캠프 크라임 주변에서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 탱크들과 군인들에 묵주, 장미꽃, 담배, 기도로 맞섰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EDSA 혁명 아래 패배했고 EDSA 혁명을 통해 보인 시민의 역량은 정부의 모든 군인들과 탱크들을 이겼다. 코라존 아퀴노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도이 라우렐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2월 25일, 마르코스 일가와 벌 장관은 말라카냥을 물러나 U.A.(United Airlines)를 통해 괌을 거쳐 하와이로 갔으며 마르코스 일가는 1989년 9월 28일, 마르코스 사망 때까지 하와이의 와이키키에서 생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