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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필리피노]마누엘 로하스(Manuel A. Roxas, 1946~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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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코리아포스… 댓글 1건 조회 3,004회 작성일 11-03-2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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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필리피노]마누엘 로하스(Manuel A. Roxas, 1946~1948)

  

1026455438-roxas.jpg1946년 7월 4일, 필리핀이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커먼웰스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은 마누엘 로하스다.
로하스는 1892년 1월 1일, 카피즈(지금의 로하스 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게라르도 로하스와 로사라 오아큐나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로하스는 카피즈에 있는 국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했다. 후에 그는 홍콩에 있는 세인트 조셉 칼리지에 입학해 공부하다 다시 마닐라 고등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마닐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로하스는 UP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1913년 UP를 졸업한 로하스는 같은 해에 사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곧 로하스는 고등법원 판사의 비서로 일을 하게 되며 동시에 UP 법대에서 법학도들을 가르쳤다. 마누엘 로하스는 그 무렵 불라칸 출신의 트리니다드 데 레온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들은 결혼생활 동안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마누엘 로하스는 정치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며 고등법원 판사의 개인 비서 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고향 주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마침내 주지사에 당선되고 그의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1922년 로하스는 카피즈 선거구에서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그는 그의 베테랑급 정치 선배들을 물리치고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22년 10월에는 하원의장으로 선출된다. 1923년 말 로하스는 미국으로 가 필리핀의 독립을 요청했다. 그와 그의 수행원들은 미 의회에 필리핀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누엘 로하스의 그와 같은 요청이 미 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로하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1932년에서 1933년까지 로하스와 오스메냐는 미국 워싱턴으로 가 미 의회에 다시 한번 필리핀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고 마침내 미 의회는 이에 대해 심각한 논의를 시작하게 된다. 1934년 헌법위원회 대의원 선출이 있었다. 로하스는 카피즈 대표로 헌법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1935년 퀘죤은 대통령으로 재당선되었고 부통령에는 오스메냐가 당선되었다. 퀘죤 대통령은 로하스를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으며 로하스는 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했을 때 로하스는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용기를 국민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전쟁 중 식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식량을 조달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로하스는 바타안, 코레지도 및 민다나오에서 일본 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그는 정치뿐만 아니라 전투에도 능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입증했다. 사실 로하스는 퀘죤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민다나오 전투에서 일본 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호세 라우렐의 중재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당국은 로하스를 감옥에 집어 넣으려 했지만 로하스는 자신이 중병에 걸린 것처럼 행동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마시타는 로하스를 비롯한 필리핀 주요 지도자급 정치인들을 바기오로 데리고 갔다. 당시 일본군은 전쟁의 패색이 짙었다. 로하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해 라 유니온의 투바오로 갔다. 전쟁이 끝난 후 커먼웰스 정부는 다시 복구되었으며 국회는 재소집되었다.

선거가 가까울 무렵 로하스는 신당을 창당했다. 그는 1946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서지오 오스메냐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결과는 로하스의 승리였다. 부통령에는 엘피디오 퀴리노가 당선되었다. 로하스는 집권기간 중 풀어야 할 여러 과제가 있었다. 전쟁으로 손상된 전국을 복구하는 것, 교육, 경제문제 등이 그것이다.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로하스는 곧 미국 워싱턴에 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쟁 피해 복구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로하스는 임기 중 여러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천연자원을 개발하고 건설 붐을 조성하고 식량증산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직에 2년밖에 머무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 임기 중이던 1948년 4월 15일, 팜팡가에서 연설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리고 그의 잔여임기는 당시 부통령이던 엘피디오 퀴리노에게 승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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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마니님의 댓글

산가마니 작성일

유익한 정보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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