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루이스 퀘죤은 필리핀 공화국의 제 2대 대통령이다. 퀘죤은 필리핀에서 가장 용감하고 당당한 대통령 중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퀘죤은 경호원 없이 거리를 홀로 활보할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며, 그럼으로 해서 자신을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누엘 루이스 퀘죤은 1878년 8월 19일 퀘죤(과거에는 타야바스라고 불렸음)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인 루시오 퀘죤과 어머니인 마리아 돌로레스 몰리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으로 마닐라 파코 태생이다. 당시 퀘죤의 양친은 모두 교사였다. 퀘죤은 평범한 주위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퀘죤의 부모는 또한 퀘죤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퀘죤은 어려서부터 그의 부모로부터 종교, 문법, 라틴어, 지리 등에 관해 배웠다. 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퀘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귀날도 장군의 혁명군에 합류해 혁명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전쟁 후에 퀘죤은 다시 학업에 전념했다. 그의 전공은 법학이었다. 퀘죤은 자신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은행원으로 일했다. 그는 항상 성적이 우수했으며 학우들에게는 언제나 모범을 보였다.
퀘죤은 1903년 8월 16일 사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는 변호사가 되어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았다. 그는 얼마 후 검사가 되었으며 곧 정치계에 입문했다. 그는 처음에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며 돈 많고 영향력 있는 상대 후보를 물리치고 당당히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1907년 퀘죤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다수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후에 퀘죤은 미 의회에 필리핀을 대표해 상주의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미 의회에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투표권은 없었다. 필리핀에 돌아온 퀘죤은 존스법 제정에 앞장섰다.
존스법은 필리핀이 자치정부를 수립해 자치통치를 할 수 있을 때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켜 준다는 것이다.
존스법이 제정된 후 필리핀은 필리핀인들로 구성된 의회를 가지게 되었다.
존스법 제정에 있어 큰 역할을 한 퀘죤은 1916년 10월 상원의장에 선출되었다. 퀘죤은 그후 줄곧 미국에 필리핀을 완전독립 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며 미국은 마침내 필리핀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끔 허락했다.
1935년 9월 17일 마누엘 루히스는 필리핀 공화국의 제 2대 대통령이며 커먼웰스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퀘죤의 지도력은 탁월했다. 사람들은 그를 ‘정의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의 정부 시스템은 공정했으며 그는 빈부를 막론하고 국민들을 공평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의 권리를 존중했으며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업적 중 괄목할 만한 것은 ‘따갈로그'를 국어로 선언했다는 것이다. 그는 국민들이 하나의 공통된 언어를 가짐으로 해서 더욱 단결할 수 있고, 사람들이 전국 어느 곳을 가거나 의사 소통에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따갈로그 사전을 만드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따랐지만 1940년 6월 19일 따갈로그는 국어로 공식 선언되었다.
따라서 퀘죤은 또한 ‘국어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재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8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마누엘 퀘죤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에는 서지오 오스메냐가 당선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필리핀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게 되고 퀘죤과 오스메냐는 미국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퀘죤은 미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지만 1944년 8월 1일 폐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진정한 필리핀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퀘죤은 필리핀 국민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