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초대 대통령
스페인과 미국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아시아 최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사람이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의 탄생 또한 커다란 망설임 속에서 이루어진 것도 그의 성격을 반영하는 예라 할수 있다.
1869년 3월 26일 당시는 성 금요일이었으며 카윗 마을은 매우 명상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트리니다드는 3일 째 계속되는 진통으로 인해 매우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희박해지는 가운데 그의 아버지 칼로스는 폭죽을 터트리기로 결정했다. 급작스런 폭발음으로 놀란 트리니다드는 있는 힘을 다해 아이를 낳게 되었으며 그 아이가 에밀리오 아귀날도였다.
그가 3세가 되었을 때 홍역을 치른 직후 1872년 카비테 지역이 폭동으로 인하여 혼란의 시기가 다가왔다. 당황한 친척들은 그를 작은 나무 아래 놓은 채 피신했다. 후에 에밀리오를 찾았을 때는 개미에 물려 온몸이 부어 올랐으며 너무 울어서 목소리도 완전히 쉰 상태였다. 그는 홍역이 재발하여 빈사지경에 처했다.
다른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첫번째 선생님은 어머니로 글을 쓰고 읽는 방법 등을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며 당시 유명했던 나방과 호롱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호세 리잘은 이 이야기를 통해 불꽃이 아름다운 것이며 이를 위해 죽는 것이 매우 영예로운 것이라 생각했던 반면, 에밀리오 아귀날도는 밝은 불빛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무모하게 불 속으로 날아가는 어리석은 나방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에밀리오는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1878년 사망한 후 그는 어머니를 도와 그들의 농장을 일구었으며 작은 공장을 경영했다.
후에 그는 작은 배 한 척을 구입하여 민도로와 비사야 지역으로 소금과 볼로 등을 운반하였으며 카비테로 등나무, 왁스, 섬유, 탠 껍질 등의 상품들을 운반했다. 그는 또한 마닐라로 가축, 물소 등을 판매하러 가기도 했다. 스페인 군인에 강제 징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어머니는 에밀리오를 마을의 세금징수 등을 하는 마을 공무원으로 봉사하게 했다. 후에 그는 카윗지방관으로 임명되어 가족을 보살피게 되었다.
에밀리오의 수줍음과 유화함을 뒤로 하고 그는 또한 매우 대담하며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출판과 배포가 금지되어 있던 호세 리잘의 ‘놀리 미 탕게레'를 구하였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이 책을 소유하거나 읽는 사람은 발견될 경우 체포됨에도 불구하고 집에 보관하여 두었다. 그는 마소닉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콜롬버스를 상징하는 콜론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그의 가명이 나타내는 의미와 같이 그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항해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는 1894년 당시 스페인 지방관으로 직무 함에도 카티푸난에 가담하였다. 그는 막달로라는 이름을 혁명 아호로 정하여 카윗의 수호성인을 기렸다. 그는 여러 카비테 사람들을 이 비밀조직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2년 후 카티푸난이 발각되었을 때 그는 그의 지역사람들 중 비밀조직에 함께 가담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페인 정부에 충실히 봉사하였다.
그는 스페인 지방 정치가의 집을 방문하여 지역의 안전을 위해 100명 가량의 스페인 군인들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스페인 군인들이 마닐라에 집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카윗으로 돌아와 산하의 조직원들을 지휘하여 법정을 침략하였으며 카윗 지역을 스페인 정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에밀리오는 카비테 지역 비밀혁명조직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 혁명정부가 가졌던 테제로스 총회를 통해 1897년 3월 22일 조직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1898년 6월 12일 그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는 이 날을 필리핀 국기와 필리핀 국가를 최초로 선보이며 기념하였다. 1899년 말롤로스 국회는 필리핀의 독립을 주창하였으며 헌법을 재정하였다. 1월 23일 아귀날도는 아시아 최초 공화국인 필리핀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임명되어 그의 직무를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필리핀-미국전쟁이 발발하자 아귀날도는 필리피노 혁명군인들을 해체시키고 게릴라를 소집하여 미국에 대항했다. 그는 1964년 2월 6일 필리핀 국민들에게 주었던 가장 큰 선물인 독립을 바라보며 사망했다.
아귀날도의 비극
팔라난까지의 피난 행렬
1899년 2월, 필리핀-미국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3월이 되자 미국인들은 증원대의 도착과 함께 필리피노들에 대항하는 활동을 더욱 거세게 실시하였다.
하나씩 둘씩, 마닐라-다구판간의 철로 변에 위치하고 있던 필리피노 전투초소들은 쓰러져 갔다. 미국인들은 이들을 피해 이리 저리로 도망하는 아귀날도를 추적해 나가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아귀날도의 죽음이나 체포가 그들의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귀날도와 그의 가족, 소규모의 대통령 직속 군대, 몇몇의 친구들은 미국세력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해 천 킬로미터 이상을 강행했다. 그들은 아귀날도 정부를 불라칸의 말롤로스, 누에바 에시자의 산 이시드로, 누에바 비즈카야의 바얌방, 팡가시난의 바얌봉으로 옮겨 다녔다. 미국인들은 아귀날도가 북쪽지방인 일로코스 술의 라 유니온과 본톡으로 움직이고자 했을 때 잠시 그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계곡, 평지, 강, 언덕을 지나가며 아귀날도는 그와 함께 움직이는 여성들이 어려운 여행을 용감하게 버텨 나가는 것을 보았다. 더 가중될 수 있는 고된 여행과 부상의 가능성들로 아귀날도는 여성들이 1899년 크리스마스 날 미국인들에게 항복하도록 설득시켰다. 아귀날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필리핀의 가장 험준한 지형들로 파란만장한 모험을 계속해 나갔다. 여행 중에 그들은 말라리아와 며칠간의 굶주림, 추위, 산족들의 공격들로 인해 괴로움을 받았다. 이들의 긴 여행은 지친 아귀날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1900년 9월 6일 이사벨라의 팔라난으로 인도했다. 며칠간 그들은 태평양이 마주 보이는 곳의 친절하고 관대한 지역 주민들로부터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다음은 팔라난으로 이주한 아귀날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마지막으로 항거하며 미군에게 항복하기 전까지의 기록이다.
9월 6일
아귀날도와 산티아고 바르셀로나, 시메온 빌라, 17인의 군인들을 포함한 그의 추종자들이 팔라난에 도착하여 몇 주간 평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가 되면 마을의 악단이 아귀날도가 머무르고 있는 집 맞은편에 위치한 플라자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이와 함께 마을 어린이들의 무용도 선보이곤 했다.
9월 29일
아귀날도와 마을 사람들은 필리핀 독립선언 2주년 기념 축하 행사를 공동 아침식사와 춤을 추며 오후 4시까지 실시했다. 어린이들은 달리기 대회 등을 가졌다. 이들은 플라자에 모여 악단들과 함께 노래를 했으며 “독립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필리핀의 영원한 독립을 기원했다.
11월 23일
50여 명의 미군들이 팔라난을 향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게 되었다. 아귀날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들이 마을에 나타났다는 단서가 될 만한 모든 문서들을 숨긴 후 모든 마을주민들과 함께 그 마을을 즉시 떠났다. 이들은 모든 소유물, 음식, 가축들을 끌고 넓은 팔라난 강을 건너 그 주변의 숲 속으로 숨었다. 미국인들은 팔라난 마을에 도착하여 아무도 살지 않음을 보고는 마을을 불지른 후 떠났다. 약 7일 후 이들은 다시 팔라난으로 돌아왔으며 주민들이 불에 탄 니파 오두막을 다시 짓도록 도와주었다. 아귀날도는 또한 디나가필란 산 근처에 위치한 수도원의 주변에 참호를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2월 8일
나자리오 알함드라가 40인의 필리피노 군인들과 이사벨라 마을 등, 주변지역들에서 모금된 전쟁 준비기금인 3천 페소를 가지고 도착했다. 아귀날도는 이 돈을 그의 군인들에게 월급으로 지급하였다. 그는 또한 팔라난의 어린이들에게 50센타보씩을 선물로 주었다.
12월 30일
아귀날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호세 리잘의 사형집행 4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엄숙한 기념행사가 성당에서 진행되었고 이때 필리핀 최고 영웅의 삶을 기념하는 연설문을 바르셀로나가 낭독했다.
12월 31일
며칠 전 아귀날도는 그의 거주지를 지방 학교건물로 이전했다. 그들은 모든 젊은 아가씨들을 리고돈에 초대했다. 자정이 되자 악단이 국가를 연주했다. 이들은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추며 필리핀 독립을 기리는 축배를 함께 나누었다.
1901년 1월 1일
대통령은 그 주민들에게 500페소를 하사하였다. 이와 함께 여러 가지 축제 행사들이 뒤이어 실시되었다.
1월 15일
아귀날도는 세실리오 세기스문도에게 루손 중심부에 있는 여러 게릴라 군대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들을 배달하도록 보내었다. 아귀날도가 알지 못하던 사이 세기스문도는 1월 말경 판타방간에 위치한 미국 군부대에 찾아가 항복을 했으며, 그가 게릴라 군에서 신임을 얻고 있는 자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물로 여러 서류와 비밀 문서들을 제시했다. 이 서류들은 아귀날도의 체포 계획을 꾸미고 있던 프레데릭 푼스톤에게 전해졌다.
1월 23일
불라칸의 말롤로스에서 실시되었던 필리핀 공화국 선포를 기념하는 축제가 이른 아침 실시된 군부 사열식을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그날 저녁 대통령 경호원들은 그 마을의 주민들을 경의하는 의미의 무도회를 열었다.
3월 20일
카시구란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하였다. 그는 아귀날도에게 2개의 봉인된 우편물을 전했다. 그것들은 울바노 라쿠나와 필라리오 탈 플라시도의 편지들을 담고 있었다. 라쿠나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게릴라 정예부대 중 한 부대를 탈 플라시도의 지휘하에 팔라난으로 보낸다는 의사를 밝혔다. 탈 플라시도의 편지는 아귀날도에게 판타방안의 10명의 미국인들에 대해 보고했다. 그 게릴라들은 이 중 5명을 사살했고 나머지 5명은 감옥에 수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귀날도는 빌라에게 탈 플라시도에게 즉시 찾아가 디눔둥안의 죄수들을 일라간에서 자유롭게 석방할 것을 전하라고 말했다.
3월 22일
이 날은 아귀날도의 32세 생일이었다.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작은 마을은 경마, 무도, 연주회를 실시하며 그날을 축하했다. 유랑 공연단이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저녁식사를 하던 타운 플라자에서 살수웰라 공연을 가졌다. 그날 아침 탈 플라시도로부터 서신이 도착했다. 그와 그의 군인들은 팔라난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탈 플라시도는 아귀날도에게 약간의 양식을 보내주어 그들의 팔라난까지의 여정이 가능하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대통령은 즉시 군인들에게 옥수수 가루 부대를 탈 프라시도의 군인들에게 전해주도록 지시했다.
3월 23일
아귀날도는 자신의 생일 잔치에 참석했던 카시구란의 여성들에게 적십자 연맹을 구성하도록 건의했다. 그날 오후 아귀날도는 탈 플라시도의 군인들이 팔라난 강을 작은 배를 타고 건너오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허름한 옷에 신발도 신지 않았으며 모제르총, 레밍턴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즉시 아귀날도는 그의 보좌관들에게 새로 온 군인들을 반갑게 맞을 것을 지시했다. 85인의 새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탈 프라시도, 라자로 세고비아와의 면담을 끝낸 후 아귀날도는 새로 도착한 군인들에게 준비된 휴식처에서 쉬도록 허락했다. 세고비아는 휴식처를 즉시 떠나 그의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갔다. 그는 “지금, 마카베베작전을!”이라고 소리쳤고 그와 동시에 새로 도착한 군인들은 대통령경호원들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아귀날도는 창문을 열고 “총격 중지”라고 여러 번 외쳤다. 그러나 발포는 계속되었으며 총구가 아귀날도와 그의 경호원들에게 겨누어졌다.
아귀날도는 그의 회고록을 통하여 “나는 그때에야 새로 도착한 군인들이 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기록했다. 아귀날도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발셀로나가 그를 막으며 “자살하지 마시오. 필리핀은 당신의 죽음을 원치 않소.”라고 말했다. 그후 발셀로나는 밖으로 뛰어나가 적군들을 뚫고 대통령의 탈출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3번의 총상을 입고 죄수로 잡혔다. 총격이 멈추었을 때 푼스톤은 집으로 들어와 아귀날도와 그의 군인들이 미국 군인들의 죄수임을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아귀날도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것이 진실이란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2일이 지난 후 아귀날도와 그의 군인들은 팔라난 만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에 옮겨타게 되었다. 그들은 말라카냥 궁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아귀날도는 미국에의 충성을 선언하도록 강요되었다.
아귀날도의 세례기록을 보면 그의 탄생은 1869년 3월 26일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모친은 아귀날도가 3월 22일 태어났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