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로 접어들 무렵 톤도 지역에서는 당시 인정받던 조세 데 라 크루즈라는 시의 대가가 살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화려한 사랑의 언어로 표현된 시들을 구입하고자 조세 데 라 크루즈의 집에 무리지어 모여들었다.
자신이 지은 따갈로그 시들에 대한 평가와 자문을 구하는 젊은 작가들도 그에게 찾아와 돈을 지불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조세 데 라 크루즈가 톤도 최초 직업시인이라고 인정되던 그 당시, 그는 생계를 위해 시를 썼고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 수입을 얻었다.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 중 돈으로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병아리들을 대신 지불하게 했다.
이와같이 시를 위해 병아리를 지불하는 행동들은 후생 시시우(Huseng Sisiw)라 불리웠다.
사람들은 조세 데 라 크루즈를 닭과 시를 교환하는 늙은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프란시스코 발락타스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던 젊은이었다. 유명한 조세 데 라 크루즈에게 자신의 시에 대한 평가를 받고자 원했으나 그의 괴팍한 성격과 심한 혹평으로 계속 미루고만 있었다.
발락타스는 몇 개의 시들을 창작하여 콜레지오 데 산 호세의 친구들과 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 되겠다는 확신이 없었고 톤도의 늙은 직업시인에게 시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어느날 용기를 얻어 후생 시시우에게 찾아갔다. 돈도 병아리도 갖고 오지 않은 발락타스를 보고 시시우는 그의 요청을 한 마디로 거절하며 돌려 보내었다. 발락타스는 시시우의 거절에 매우 화를 내며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하여 시시우가 자신에게 거절하며 돌려 보냈었다는 사실을 후회하도록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836년 발락타스는 마닐라의 판다칸으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아름다운 마리아 어선션 리베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를 사랑하던 여러 경쟁자 중에는 부유한 나농 카퓰이 가장 유력한 경쟁자들로 손꼽혔다. 카퓰은 발락타스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카퓰과 리베라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 그는 자신의 아픔을 시로써 표현하여 그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하였다. 그가 리베라의 결혼 소식을 듣고 쓴 시는 플로란테 데 라우라(florente de Laura)로 실연당한 사람의 슬픔을 구어체로 표현한 것이다.
형을 마치고 그는 톤도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작문능력을 시와 연극을 쓰며 더욱 발전시켜 갔다. 1840년 그는 법정의 서기로 임명되어 바타안 우디옹으로 전임하였다. 1842년 주아나 티암벵과 결혼할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였으며 결혼증명서에 최초로 그의 성을 발타잘로 기록했다. 법정 서기로 활동하던 당시 불행히 실수가 발생하여 발락타스는 머리털이 잘려 또 다시 수감되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구해내려 소유한 재산의 대부분을 소비했으나 아무 소득도 없이 돈만 낭비했다. 그는 바타안의 발랑가에 수감되어 있다가 마닐라로 이송된 후 형을 마치고 풀려났다.
그는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가족이 입은 재산 손실을 회복하는 데 전력을 다하여 작문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백여 개 이상의 시, 연극, 풍자문들을 저술해 나갔다. 플로란테 앗 라우라를 제외하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라 인디아 엘레간테 이 엘 네그리토 아만테'라는 연극과 ‘오로스만 앗 자피라'라는 희극만이 알려져 있다. 해박한 지식과 그의 작문능력에도 불구하고 발락타스는 계속 가난에 찌들어 사는 생활을 영위했다.
그의 임종 무렵 발락타스는 그의 아내에게 11명의 자식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작가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을 부탁하며 “누구든지 시를 쓰려고 시도만을 하더라도 그 손가락을 자르라!”고 당부했다. 발락타스는 좌절과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모든 필리피노가 자신을 최고의 필리피노 시인으로 극찬하며 칭송하는 영광을 보지 못한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