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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를 만들어온 5가지 사건

작성일 11-03-26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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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아포스… 조회 2,741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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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역사를 만들어온 5가지 사건

   

123451116611.jpg1. 바탄 죽음의 행진 Bataan Death March

제2차 세계대전초 일본군에 사로잡힌 7만 명의 미국인과 필리핀 전쟁포로들이 강제적으로 행한 행진.

1942년 4월 9일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를 출발한 대열은 산페르난도까지 88㎞를 강제 행진했고 이어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했으며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13㎞를 행군했다.

이들은 행군과정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낙오자는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하는 등 숱한 박해를 받았다. 결국 7,000~1만 명의 포로들이 행진중에 사망하고 단지 5만 4,000만명이 수용소에 도착했으며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난 뒤, 그 행진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필리핀 침공작전을 수행한 일본군 사령관 홈마 마사하루 중장이 기소되었으며 1946년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미국 군사위원회의 재판 결과 유죄가 인정되어 4월 3일 처형되었다.

2. 필리핀 봉기 Philippine Insurrection
미군과  혁명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1899~ 1902).
이 봉기는 스페인 통치에 대한 필리핀 혁명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파리 조약(1898)이 맺어져 필리핀에 대한 통치권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옮겨졌지만 마닐라를 제외한 전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던 필리핀 군부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02년 봉기의 종결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후 몇 년 동안 간헐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조지 듀이 제독은 1898년 5월 1일 아침 마닐라 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지만 그후 3개월 뒤 육군이 도착하고 나서야 마닐라를 점령할 수 있었다. 8월 13일 마닐라는 무혈의 ‘전투’를 치른 뒤 점령되었다. 스페인 총독 페르민 하우데네스는 자신의 명예유지를 위해 저항하는 척하다가 비밀리에 항복했다. 미군이 마닐라를 점령하고 필리핀 혁명세력이 그 이외의 전국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 전쟁은 1899년 2월 4일 밤 마닐라 외곽에 대한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1899년 봄 내내 미국 군대는 북쪽으로는 중앙 루손 평야까지 밀고 올라갔고, 그해 말 필리핀 장군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접근하기 어려운 북쪽 산악지역으로 후퇴했다. 재래식 전투는 끝났으나 봉기 지도자들은 여러 지역에서 격렬한 유격전을 계속했다.

1901년 사마르 섬에서 더욱 격렬하게 전투가 벌여졌다. 유격대에 의해 미군이 학살된 데 격분한 제이콥 F. 스미스 장군은 잔혹한 보복전쟁을 벌여, 후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퇴역했다. 1902년 이후에도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미군 당국은 나머지 유격대들을 도적으로 간주했다.

시메온 올라가 이끌던 1,000여 명의 게릴라들이 1903년말까지 투쟁했고, 마닐라 남부 바탕가스 지방에
서는 마카리오 사카이가 지휘하는 군대가 1906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미국인 정권에 대한 마지막 조직적 저항은 1904~06년 사마르에서 일어났다. 이곳의 평화로운 마을을 불사르는 봉기자들의 전술은 실패했다. 이후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명실상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1946년까지 통치했다.

3. 필리핀 혁명 Philippine Revolution
300년 이상의 스페인 식민통치 후에 벌어진의 독립투쟁(1896~98).
이 혁명은 스페인 통치의 무력함을 폭로했으나 필리핀 군도에서 그들을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1898년 스페인의 필리핀 지배가 종식되었지만 필리핀 혁명세력과 미군과의 유혈전쟁인 필리핀 봉기가 일어났다.

종교적 성격을 띤 수많은 봉기들은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를 중단시켰지만 그 누구도 유럽인들을 몰아낼 만큼 충분한 단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교육수준이 높은 필리핀 중산계층의 부상과 함께 필리핀 독립에 대한 열망도 더욱 커갔다. 1872년 전까지의 반대투쟁은 주로 필리핀 성직자들에 의한 것으로 한정되었는데, 그들은 필리핀 군도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스페인 사람들의 권력 독점에 분개했다. 그해에 스페인에 대항해 소규모 봉기인 카비테 봉기가 일어났는데, 스페인 정부는 이를 핑계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카비테에서 봉기한 사람들과 은밀하게 봉기 계획을 추진했던 필리핀인 세신부 호세 부르고스, 마리아노 고메스, 하신토 자모라의 순교는 국민들의 반스페인 감정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개혁의지가 넘치는 필리핀인들은 유럽에 피난해 선전운동으로 알려진 문예운동을 전개했다. 호세  박사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 운동의 지도적인 선전가로 부상했다. 그의 소설 〈사회의 암(癌) Noli me t ngere〉(1886)은 마닐라 스페인 사회의 부패를 폭로하고 독립운동을 고무했다. 1892년에 이르자 스페인 식민정부의 개혁의지가 없음이 명백해졌다.

독학한 창고점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마닐라에서 이라는 비밀혁명단체를 조직했다. 회원은 계속 늘어 1896년 8월경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무렵 스페인 당국도 이 조직의 움직임을 알아차렸다. 이에 보니파시오는 즉시 무장봉기를 호소했다. 그때 스페인 정부는 리살 박사를 체포했는데, 리살은 개혁은 부르짖었지만 혁명은 동의하지 않았다. 1896년 12월 30일 리살 박사의 공개 처형은 필리핀인을 격분시켰고 나아가 이들을 단결시켜 스페인의 계속적인 권력 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897년 3월혁명의 주도권은 젊은 장군 에밀리오 에게 넘어가 보니파시오를 선동죄라는 죄목으로 총살했다. 그는 필리핀 용병들에 의해 보강되던 스페인 군대의 무력타도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1897년 말 아기날도의 혁명군은 마닐라 남동쪽 산악지역으로 밀려났다.

1897년 12월 15일 비아크나바토 협정이 공포되었다. 비록 세부조항들은 그후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일단 협정으로 인해 필리핀 혁명이 일시적으로 종결되었다.

아기날도와 다른 혁명 지도자들은 무력투쟁의 포기 대가로 홍콩으로의 망명과 40만 페소의 돈, 그리고 스페인의 실질적인 정치개혁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느 쪽도 충실하게 협정조항들을 준수한 것은 아니었다. 아기날도는 홍콩에서 무기구입을 위해 돈을 썼고 스페인도 개혁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898년 5월 1일 미해군 사령관 조지 듀이가 마닐라 만에서 스페인 함대를 전멸시킨 뒤 아기날도는 즉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그는 새로 미국에 대항하는 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스페인의 패배에 따라 미국이 필리핀 통치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기날도는 1901년 미군에 체포된 이후 필리핀인들에게 미국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미국의 통치를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4. 카비테 반란 Cavite Mutiny
200명의 필리핀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카비테 조병창에서 일으킨 일시적 봉기(1872. 1. 20).
스페인은 이 사건을 필리핀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았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지 당국의 무자비한 대응은 도리어 민족주의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반란 자체는 금방 진압되었지만 반동적인 총독 라파엘 데 이스키에르도 치하의 스페인 식민당국은 이 사건을 확대과장해 이를 정부개혁을 요구하던 필리핀인 탄압을 위한 구실로 활용했다.

무수한 필리핀 지식인들이 체포되었으며 반란자들과 공모했다는 죄로 고발되었다.
간단한 재판이 열린 후에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사모라, 마리아노 고메스 등 성직자 3명이 공개처형되었다. 이 세 사람은 이후 필리핀 독립운동의 순교자로 상징되었다.

5. 레이테 만 전투 Battle of Leyte Gulf
1944년 10월 23~26일에 벌어져 제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꿔놓은 해군·공군전.
이 전투로 일본의 연합함대는 궤멸되고 미국은 필리핀 진공에 성공했으며 연합군은 태평양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10월 20일 필리핀 중부의  섬에 대한 미국의 상륙 공격으로 개시되었다.

일본군은 쇼고[捿號] 작전으로 대응했다. 일본의 작전은 미국의 제3함대를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으로부터 북쪽으로 유인하는 한편 3개 군(軍)을 레이테 만에 집결시켜 미 상륙군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의 제1공격군은 북쪽으로부터 시부야 해를 건너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해 남하하고, 제2공격군과 제3공격군은 남쪽으로부터 민다나오 해를 건너 수리가오 해협을 통해 북상하기로 했다.

일본군이 레이테의 남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미국 제7함대의 잠수함들은 제1공격군을 발견하고 10월 23일 팔라완 서쪽에서 중순양함 2척을 격침했다.

잇따라 시부야 해에서 지상과 공중전이 계속되었고, 미국의 제3함대는 일본의 유인 선단을 추격했다. 10월 25일 마침내 레이테 만 전투의 3대 결전이 거의 동시에 벌어졌다.

수리가오 해협에서는 제7함대 소속의 전함과 순양함들이 제3공격군을 격멸하고 제2공격군을 격퇴했다.
한편 제1공격군은 무방비의 산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하여 사마르 근해에서 제7함대의 항공모함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미 상륙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순간 갑자기 퇴각했다.

북쪽에서는 엥가뇨 곶 근해에서 제3함대의 일부가 일본의 유인용 항공모함들을 격침하고 남은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제1공격군을 공격하며 추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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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가마니님의 댓글

산가마니
작성일

유익한 자료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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